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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람한테 상처받았으면서 그걸 사람으로 치유한다고? 너도 정말 이상하다, 백과야.
눈을 깜박였다.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. 낯이 익었다. 당연하다. 네 목소리잖아. 이상한 느낌이었다. 나는 지금 하나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, 들려오는 말은 여러 가지. 또 다른 내가 말이라도 걸고 있나? 그런 …… 소설 같은 이야기. 말도 안 되지. 이상한 꿈을 꾸고 있구나. 손가락을 까닥여본다. 가위라도 눌린 건지,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. 눈꺼풀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인 건가. 아닌가? 그래봤자 보이는 것은 어두컴컴한 밤의 천장이라.
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. 붕붕, 뜨는 듯한 소리. 웅웅거리는 바람소리. 뭐라고 하는 지 제대로 들을 수도 없어. 웅얼거려, 뭉개져 ……. 대화를 요구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. 움직일 수 있었다면 고개를 진작 기울였을 테다. 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냐고. 애초에 …… 그는 사람이 아닌데. 신이잖아. 내가 그를 평범한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할 수 있을 리.
있지.
어느 경전에서 신과 함께 일상을 지내며 평화를 누리더니.
그게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반응이지. 안 될 게 있니. 지금, 누리고 있잖아. 평화롭잖아. 나는 나 자신을 싫어하는 것처럼 입을 여는구나. …… 그래, 원래 싫어했지. 아닌 건 아니지.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. 굳이, 이 상황에 입을 열며 초를 칠 이유가 있나?
제 신과 함께한 지 어언 반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.
이제 와서 자신의 방식이 싫다며 괴로워하기란 우스운 일이었다. 더군다나 잘못된 표현마저 사용하며. 나는 문제를 하나도 못 느끼는데, 왜 가만히 있던 게 입을 여는 거지. 이해할 수 없어. 알 수가 없네 …….
사람을 신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 아냐?
정신차려. 그건 신으로 여기는 게 아니야. 너는 인간의 교류란 걸, 경험하는 거잖아. 근데 딱히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니라서.
치유라고 하는 것도 웃기잖아.
하나씩 말해줬으면 좋겠다. 굳이 말을 끊어서 해야 할 …… 이유가 있나. 여전히 눈을 깜박여도 보이는 것은 없고,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. 그러나 집중할 수 있는 게 목소리뿐이라 하여 내용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건 아니다.
네가 무슨 치유를 한다고.
철저한 자기부정으로 가득찬 문장이라는 것만 인지하면, 결국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 ……. 그냥 눈을 감자. 다시 잠에나 들까. 거실로 나가기만 하면,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이 부정을 떠나보내줄 이가 있었다. 아무리 필사적으로 저렇게 외쳐도 자신에겐 이제, 큰 타격을 줄 수 없다고. 막말로 종말이라는 허무맹랑한 것에 매달려 모든 것을 놓고, 그와 동시에 동앗줄을 쥐기로 한 자에게 들리는 게 있을 리가.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. 그러니 저 목소리도 알고 있다. 그런데도 이렇게 강조한다고, 왜? 뭘 위해서? 누굴 위해서.
사람이란 것조차 인지하지 않으면서!
괜찮다고 생각해도, 결국 아무것도 쌓지 못하고 무너질 거라고. 이해를 못하겠어? 그렇게까지 멍청할 수 있구나, 백과야.
시끄러운 헛소리만 내뱉을 거면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어. 나는 잠에 들 건데, 잠에 빠질 건데. 나를 위한단 말은 아무 소용없어. 나를 위하는 건 ……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지 오래다. 진작 그렇다. 이 세상에 내 편이 있을 리 있니. 무너진다면, 이미 각오한 범위 안일 테니 무서울 게 없다. 백과는 못하겠지만, 비블리아는 그럴 수 있어. 리아는 그럴 수 있어. 사람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면은 모두 다 버리고, 꽁꽁 감춰놓았으니까. 상처 하나 입지 못하는 것들만 바깥에 내놓았는데, 무엇이 두려울까 …….
…….
인간은 무너져.
…….
그렇다면 한편으론 기쁠지도 몰라.
나를 …… 위하는 사람이 있구나, 하고.
…….
“ …… 아. ”
눈을 깜박였다.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. 하나의 생각을 하면,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. 손가락을 까닥이면, 몸이 움직인다. 차분하게 인지한다. 가위가 풀렸어. 이상한 꿈이었어 …….